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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기초탄탄 욕망, 나, 그리고 규율권력 (하심당 기초탄탄 1학기 에세이+후기)

2024.05.02   조회수 50회    강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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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는 지금 어디에?

자존감 높이기, 진정한(=남보다 잘난) 나 - 정체성- 찾기… 그런 것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라고 믿었다.  자기 계발 서적을 너무 많이 읽은 부작용인지 내 문제는 다 거기서 기인한다 여겨 그놈의 ‘나’를 찾느라 참 많은 것을 시도해 왔다.  대학도 전공을 바꿔 두 번 다니고 부산, 서울, 강릉, 미국, 영국, 스페인에서 살아 봤으며 여행도 제법 많이 다녔다.  그렇게 다양한 곳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아도 내가 찾아 헤매는 그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의 설렘이 지나면 오히려 괴로움만 몰려올 뿐이었다.  나는 제법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왜 종종 허무하고 자괴감이 들까? 라는 질문에 한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니가 하는 게 돈이 안돼서 그래.”  오~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초기 투자 없이 시간과 머리만 쓰면 브랜딩에 홍보까지 가능하다는 SNS 인플루언서 되기에 도전했고 예상 밖으로 초반부터 제법 잘 나갔으며 재미도 있어 40년 인생에 처음으로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결국 좌충우돌하다 2년 만에 번아웃이 왔고 결정적으로 인간관계에 크게 한번 데이고 나니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이러다 제명에 못 살겠다는 각성이 왔다.  그 후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올해는 하심당에서 3년째 인문 고전과 의역학을 공부하며 역시 문제는 돈과 명예가 아니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평안함이라니!  그런데 얼마 전 유튜브 쇼츠 영상을 넘기던 중, 몇년 전 인스타 활동할 때 만나 나에게 인간관계의 쓴맛을 보여준 바로 그 친구의 채널이 나왔고, 거기엔 ‘좋아요’ 몇만 개, 댓글은 몇백 개가 달려 있었다.  업계 용어로 “떡상"한 것이다.  그 친구와는 그 사건 후에 서로 사과하며 화해해서 나쁜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내 발로 도망쳐 나온 그 세계에 다시 돌아갈 맘도 없는데 왜 나는 그의 성공을 보며 가슴의 철렁함과 동시에 압도적 씁쓸함을 느끼는 것일까? 

욕망과 규율권력

그런 감정을 단순히 질투심이라고 넘기기엔 석연치 않았다.  내가 가지고 싶지도 않은 것에 질투를 느낀다고?  나의 무의식에 뿌리내린 카르마 같은 것일까?  그러다 내 욕망은 진정 내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고 거기에 대한 힌트를 미셸 푸코에게서 찾았다.  푸코는 『정신 의학의 권력』에서 세계의 구동방식이 주권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 이동해 온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설명한다.  주권권력의 시대에 왕이라는 하나의 신체가 개별성 없는 다수에게 권력을 행사했다면 왕이 사라진 시대를 지배하는 규율권력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것이 아닌, 은밀하고 분산되어 있으면서 개인의 신체에 닿아 파고들어 신체를 장악하는 특정한 양식이다.  대략 14세기부터 수도사 공동체에서 형성되어 정신요양원, 감옥, 군대, 학교, 복지시설 등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보는 규율권력은 19세기에 마침내 정치권력과 접속하여 개인 신체를 장악하고 “뇌의 말랑말랑한 섬유”에까지 작용하게 된다. 그것을 정치권력과 신체의 시냅스적 접촉이라고 푸코는 명명했다.  나는 그가 분석했던 그 19세기 사회 형태와 흡사한 21세기 초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내 것이라 믿었던 내 생각 역시 규율권력에 조종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성공한 친구를 보며 내가 욕망하지 않는 것조차 욕망하는 듯 한 모순된 의식의 흐름이 납득 가능해진다.  이 곳에서 공부하는 삶이 행복한 건 분명하지만 무의식으로는 돈과 명예가 지배하는, 혹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잔재가 될까 두렵고, 나는 소외된 자인가 싶어 그런 씁쓸함을 느낀 것이다. 대충 귀동냥한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노예 중에 그나마 프리미엄 급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내 의식이 닿지 않는 세포 속에 여전히 우글거린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라는 개인, 너 진짜야?

게다가 규율권력의 더 어마어마한 점은 바로 “개인"이라는 어떤 것을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정한 나’라는 개인 역시 결국 규율권력의 기술을 개인에게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규율권력이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권력에 의해 장악되려고 생겨난 모종의 효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푸코에 따르면 정치권력이 신체에 확실히 고정되는 절차로 신체가 주체화되고 주체-기능이 신체 위에 고정되었으며 신체가 심리학화되고 규범화되었기에 규율은 개인의 탄생을 야기했다고 한다.  즉, 규율권력 시스템 내의 끊임없고 영원한 시선, 그런 “일망감시”는 문서기록 등의 도구로 강화되고 결국 잠재성과 성향으로 평가받고 처벌받는 끊임없는 압력이 개인을 개인으로서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했으며 그러한 개인은 더 이상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이 아닌 것이다. 

푸코의 시선으로 뒤 돌아본 나의 지난 궤적들은 그야말로 규율권력에 충실히 일망감시 당하며 기꺼이 평가받고자 한 행동들이 가득했다. 학교에서는 교칙을 잘 지키고 잔재-불량학생-들을 경멸했으며 완벽한 문서기록을 보유하고자 시험 점수를 올리는데 즐겁게 혈안이 되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모범시민”이라 자처하며 규율을 위반하는 남들을 “서울 스마트 불편신고" 앱으로 고발하는 취미로 희열을 느꼈다.  고작 규율권력에 지배당하거나 그것이 구동하는데 필요한 부속품 역할을 하기 위해 생성된 것일지 모를 “나”라는 자아를 고귀하고 특별할 수 있는 무엇이라 상정하고 더 잘나보이는 나를 찾겠다 혈안이 되어 있었던 꼴이다.  섬뜩한 것은,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오롯이 자유의지로 인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는 것.  규율권력은 내 영혼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신체의 몸짓이 시작되기도 전에, 최초의 미동이 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나를 규율체계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조종해 왔는데 말이다. 

자, 이제 나는 이런 규율권력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그 문제는 앞으로 3학기 더 푸코를 공부하며 천천히 고심해 봐야겠다.  평생 공부해도 영혼에 있는지 시냅스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규율권력이라는 것 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힘들겠지만, 그러므로 공부를 그저 쭉~ 해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늘어난 셈이다.  이제 형체없는 그것의 존재는 인식했으니 첫 발걸음을 떼어 보자.  푸코 선생님과 함께!


<후기>

하심당 1학기 수업의 마지막 날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 까지 퀴즈, 에세이 발표, 그리고 심도깊은 피드백으로 꽉 찬 하루였다.  예정에 없었던 에세이라 다들 힘드셨을텐데 충실히 써 오신것, 그리고 수영샘의 디테일하고 정성어린 피드백, 간간히 장금샘의 날카로우면서 따뜻한 조언들 모두가 감동이었고  긴 시간 이어진 수업에 다들 지치기도 했지만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의가 느껴졌다. 

나는 푸코의 규율권력과 그로인해 발생한 개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나의 고민에 접목시켜 글을 어떻게 써 보긴 했지만 몇번을 고쳐도 여전히 찜찜함이 남았었는데 딱 내가 그렇게 느꼈던 부분을 수영샘이 지적해 주니 문제가 무엇인지 좀 더 명료해졌다.  피드백을 들어도 그것을 십분 이용해 글을 고치기는 힘들테지만 말이다.  그런 큰 개념 외에 자잘한 것들, "정제되지 않은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표현" 을 쓴 부분은 고쳤고 언어유희로 유머러스하게 써 보려고 했지만 재미 없다는 지적을 받은 것 역시 진지하게 바꾸었다.  그냥 올려 버릴까 고민하다 수정하고 보니 훨씬 낫다.  이것이 배우는 즐거움 일테지. 

1 학기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반들과 출발하는 설레임에 그리 공부에 푹 빠지지는 않았다.  여름, 가을, 겨울... 시간이 갈 수록 익어가는 공부가 되었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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