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운명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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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책
학인들은 칼럼쓰기에 이어 리뷰 쓰기에 도전했다. 리뷰가 칼럼과 다른 점은 책을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리뷰의 관건은 어떤 책과 만나는가, 어떻게 만나는가이다. 리뷰 쓰기는 책을 통해 ‘만남’ 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과 잘 만나려면 잘~ 읽어야 한다. 읽기가 안 되면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조원은 8명으로 8주간 만났고, 결국 읽기 과정을 거쳐 각자의 리뷰를 생산해냈다. 그 좌충우돌의 과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리뷰 쓰기는 텍스트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정 도서 39권 중에서 딱 한 권의 책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조원들이 모든 책을 꼼꼼히 읽고 결정할 기세였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그런 선택은 불가능했다. 책을 선택하는 과정은 수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끌릴 때 한 마디의 말이나 작은 표정에서 매력을 느끼듯 책의 선택 또한 다르지 않다. 표지가 예뻐서,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제목이 끌려서 등 각양각색의 이유로 책은 결정되었고, 이렇게 결정이 되는 순간 미련없이 이책과 만나야 했다.
읽기는 책과 '만나는 일'이다. 책과 만나기 위해 2가지 읽기 미션이 주어졌다. 첫 번째는 ‘무심하게 읽기’였고, 두 번째는 ‘사심으로 읽기’였다. 무심하게 읽기란 기존에 가진 통념이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책이 말하는 바를 경청하는 것이다. 꽉 찬 자신의 생각으로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 봤자 생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무심하게 읽기의 핵심은 자신을 비우며 읽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통념이 만든 표상이 깨지면서 새로운 앎이 흘러 들어온다. 이 과정은 쉽지는 않았지만 찬찬히 차서를 밟았기에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사심’으로 읽기에서 일어났다. 사심은 무심과 대립되는 의미로 자기 문제의 주체가 돼서 읽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무심으로 읽기가 책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거라면 사심으로 읽기는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책과 적극적으로 접속하는 과정인 것이다. 조원들은 무심과 사심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서인지 자신의 문제의식을 찾는 것을 무척 어려워했다. 하지만 글이란 내용 정리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 문제의식이 있어야 자신만의 글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본격적으로 끌을 쓸 때가 되자 학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심으로 읽기 즉, 자신의 문제의식을 통과한 그 만큼이 글쓰기의 재료였음을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발표 때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이제 재료를 준비하면서 요리를 해야 했다. 즉, 문제의식을 만들면서 글을 전개해야 하는 과정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두려웠다. 과연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요약에서 끝나는 게 아닐까, 8주가 너무 짧은 게 아닐까. 이런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마감때까지, 할 수 있는 한 해보기로 했다.
B는 리뷰의 감을 빨리 잡은 유일한 조원이었다. 문장도 좋고 구성도 나쁘지 않았지만 내용이 진부했다. 이광수의『재생』을 선택했는데 이광수가 민족 반역자라는 점에 꽂혀 있었다. 문제의식을 재설정해야 했다. 재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미친 효과였다. 민족 반역자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이광수의 영향력에 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재생에 등장한 봉구와 순영의 이분법적인 사랑이 지금 시대에 멜로드라마에서 반복되는 근원을 캐보자고 제안했지만, 나의 제안은 G의 글에 반영되지 못했다. G는 과거 교과서에서 배운 표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문제를 재설정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G는 이번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주입식 앎에 붙들려 있는지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되었다.
C는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바가 정확하게 있었지만 주장만 있고 논증이 약했다. C는 리뷰를 쓰면서 화가 난다고 했다. 마음대로 쓰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자 책에 끌려가는 자신이 싫다는 것이다. C는 자기 주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자기 주도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게 아니다. 책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주도를 하려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하고 그것은 몸의 근육을 만들듯이 훈련해야 한다. 리뷰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책과 교감하면서 그것을 찬찬히 익혀갈 때 새로운 언어 생산이 가능해진다. C는 당장 원하는 글을 쓰진 못했지만 자기 주도적이란 질문을 품게 되었고, 책과 충분히 교감하는 과정을 훈련해야 한다는,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달인 시리즈’를 선택한 D와 F는 시간이 지나도 요약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대가 다른 고전은 언어가 달라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리라이팅한 달인 시리즈는 고전보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읽힌다. 하지만 그 깊이는 고전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이것을 녹여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D와 F는 텍스트를 선택할 때 술술 잘 읽힌 것만 생각하고 ‘달인 시리즈’를 선택했다. 꼼수를 부린 것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쉽게 가려다가 발목 잡힌 꼴이 된 것이다. 즉, 자신의 문제의식 없이 텍스트를 선택했으니 요약 정도의 글 전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밖에. 이런 경우, 자신이 쉬운 길을 가려는 습성을 자각하고, 내가 왜 글쓰기를 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근본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그때 집중력이 발휘되고, 정확한 문제의식이 생기므로 그때야 비로소 글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G는『낭송 장자』를 읽으면서 자신이 현재 주목했던 장애인 문제와 연결했다. 호접몽 등 유명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당면한 문제, 장애인을 입구로 장자와 접속을 시도한 것이다. 장자는 대표적인 은둔과 피세의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런 표상을 깨고 남들이 주목하지 못한 장애인에 꽂힌 것은 G가 특수교사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발상은 신선했지만 장애인과 장자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고 글을 전개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장애인과 장자의 도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너무나 신선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좌충우돌 리뷰쓰기가 진행되었고 드디어 끝을 맺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책의 선택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파트너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듯, 책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인들은 이번 글쓰기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운명의 책 따위는 없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만남의 과정이다! 즉, 잘 읽게 되면 운명의 책이 되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책의 소리를 경청하고 질문을 던지며 적극적으로 책을 읽는 과정 속에서 글은 생산되고 그 글은 내 삶을 생산한다. 그러느까, 읽기는 책과 교감하는 일이고 세상과 교감하는 훈련이다. 교감한 만큼 읽을 수 있고, 읽은 만큼 쓸 수 있고, 그 만큼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즉, 읽기가 쓰기라는 것! 고로,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 그래서 운명의 책이란 따로 없다. 과정을 충실히 밟은 책, 그 책이야 말로 '운명의 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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