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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여행, 후유증, 일상

2024.03.06   조회수 596회    하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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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유증, 일상

박 장 금(감이당)

지중해 후유증

윤하 : 지중해 여행 어땠어요?

나   : 하늘이 너무 맑고 좋았어.

윤하 : 오늘 날씨처럼요?

나    : 뭐? 어디다 비교해?

윤하 : 어제까지 미세먼지로 탁했는데, 오늘은 정말 맑은 거예요.

나    : 지중해 하늘을 보면 이런 날은 맑은 날로 보이지도 않을 걸? 하늘은 높디 높고, 투명하다 못해 잡힐 것 같고…

윤하 : 우리나라 가을 하늘만큼 높고 파래요?

나    : 비교 불가능하다니까...어떻게 말해야 할까.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해. 지중해 날씨를 경험하지 않고서는...ㅠ.ㅜ 

어느새 난 지중해 다녀온 뇨자가 되어 있었다. 곰샘이 서울에 들어서자 이런 말을 했다. “서울 날씨가 왜 이렇게 탁하니?” 나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열흘 동안 몸이 지중해 체질이 되었나 봐요. 서울이 너무 낯서네요.” 여행은 그래서 하나 보다. 지중해를 못 봤으면 지구 하늘이 다 똑같은 줄 알고 죽었을 테니까. 내가 너무 기대 없이 지중해를 가서 그런가? 아니면 내 안에 지중해가 있었나? 지중해를 다녀온 후 이런 저런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난, 과거, 유럽이나 미국출장을 다녀왔지만 시차 따윈 거의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참을 수 없는 우울증이 밀려왔다. 손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뭐라 말하기 참 어려운데...아무튼 무기력하고 멍했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할 것은 쌓여 있는데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낮에는 몸에 기운이 없어서 흐느적 거리다가 이러느니 일찍 자자 싶어서 잠자리에 들고 눈을 뜨면 자정 12시이다. 왜 이 시간에 눈이 떠지는거지? 지중해 지역 시간을 보면 그곳은 오후 5시! 우리가 그곳에서 한참 활동하던 시간인 것이다. 단 10일 여행을 했을 뿐인데, 49년 동안 살아온 생체 시계가 무력화 되는 건가?! 싶었다. 

여행 후유증은 이 밖에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헌 옷 나눔 행사를 하는데 지중해와 관련된 문양의 물건에 유독 눈이 갔다. 파란색 쇼울은 바다로 보였고, 돌고래까지 그려져 있자 박물관에서 보았던 물고기 문양 도자기가 떠올랐다. 나는 그 쇼울을 기어기 구입해서 내 방에 걸어 놓았다. 방에 들어가면 크레타 바다의 돌고래가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향수병인가? 그렇다. 처음엔 향수병으로 착각했다. 고작 10일 있었는데 향수병이라고? 오버도 한참 오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증세는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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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우울증이 계속 되었다. 그론데 알고 보니 나만 우울한 게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ㅎ) 여행을 함께한 곰샘과 학인들도 의욕 상실을 토로했다. 곰샘의 증세는 가장 심각했는데 이런 말까지 하셨다. 연구실 백수들의 '심신 분리증'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걔들이 마음과 몸이 왜 따로 노는지 알겠어. 내 위장이 아무 의욕이 없다고 말을 해.” 역시 곰샘이다. 자신의 변화를 비추어서 청년 백수들을 이해하는 폭넓은 이해심으로 확장하시다니! 그러면서도 한편 든 생각은 그렇다면 곰샘은 한 번도 심신이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말인가? 나도 곰샘을 재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여행은 쎄다. 곰샘을 이렇게 변화시킬 정도라면 나의 증상도 특별한 것은 아니니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궁금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일까.

즐거움 vs 우울증, 팽창과 수축

처음엔 난 향수병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다. 지중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라고. 지중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환장하게 좋아서 미칠 지경은 아니었다. 그렇담 이 증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의 이런저런 분석이 이어졌다. 첫째 너무 많은 나라를 다녔다는 것. 아테네, 크레타, 산토리니(여긴 배로 이동), 바르셀로나로 비행기를 바꾸어 타면서 심신이 공중 부양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과거 같으면 지중해 여행을 감히 생각이나 했을까. 연암은 열하를 가기 위해 얼마나 생고생을 했겠나. 하지만 난 연암과 달리 비행기에서 잠 한 번 자고 나자 뚝딱 그 나라에 도착 했다. 내가 유럽까지 가기 위해 움직인 것은? 기껏해야 조금 걸은 것밖에 없다. 한 마디로 날로 먹은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주파한 셈이니, 그 간극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분석한 두 번째는 너무 많은 인원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맞다. 감이당 사상 최다 여행이었다. 최초 구성원은 10명으로 시작했다. 세미나를 하면서 7명이 추가되었고, 이집트, 영국, 중국에서 날아온 3명, 스페인에 거주한 1명까지 총 21명이 함께했다. 인원이 많아서 여행이 피곤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너무 좋았다. 공부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여행도 함께 할 수 있는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오기도 하고, 뒤 늦게 합류한 학인들과 만났다. 얘기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같이 밥을 먹고 낭송과 공부를 하고 걷고 쉬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했다. 이렇게 즐거웠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너무 좋다보니 나도 모르게 '심신 항진' 상태가 된 것이다. 동의보감에 기쁨이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걸 제대로 체험한 셈이다.

duy-pham-Cecb0_8Hx-o-unsplash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 너무 좋은 사람과 잘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심신 항진 상태가 된다는 것!

이제 세 번째 분석인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여행 10일 동안 단 한 번도 흐린 날이 없었다. 지중해의 맑은 날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높고…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곳을 찍어도 멋진 날씨가 배경이 되어 주었다. 여행 10일 동안 최고의 날씨가 유지된 것이다. 좋은 날씨와 호흡을 맞추려면 내 몸도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와 스페인은 서울보다 해가 길었다. 특히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8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놀다가 10시가 넘어야 저녁을 먹고, 낮에는 유명한 낮잠 시에스타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지중해에서 나의 심신 날씨는 언제나 쾌청 모드! 가벼운 몸, 즐거운 마음은 지중해 날씨와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심신은 매우 놀랐을 것이다. 한꺼번에 너무 좋은 것을 누려서. 감이당에서 맨날 지지고 볶다가 좋은 곳, 좋은 친구, 좋은 날씨를 한꺼번에 만났으니. 몇 년에 걸려 누릴 수 있는 복을 한방에 누린 것과 같다. 축구 경기를 보다가 승리의 기쁨에 심장마비로 죽은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이 기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너무 기쁘면 심장이 터진다. 클럽에서 미친 듯이 놀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울적해지는 기분 같은 것. 고조된 즐거움을 기준 삼으면 일상은 밋밋하고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동의보감식 관점으로 보면 즐거움이 계속 되는 것도 에너지의 무한 방출임임을 실감한 것이다.  그러니까 작용, 반작용의 물리 법칙에 의해, 즐거움을 누렸으면 그 만큼의 반대 감정 또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심신이 엄청난 팽창 작용을 했으니 엄청난 수축 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우울증과 의욕상실은 수축을 위한 몸의 생명활동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복을 누리는 것도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그러니 굴러온 복도 살살 누리거나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주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좋은 여행을 했으니 그 후유증을 감당해야 한다는 이해가 생기자 마음이 편해졌다. 혹시라도 환상을 갖지 마시라. 지중해에 간다고 최고의 여행이 되는 건 아닐테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은 왜 최고의 여행이 된 걸까? 

글쓰기, 여행의 비결

우리의 여행이 다른 여행과 다른 점이 있었다. 글을 써야 했다. 만약 여행기 미션이 없었다면? 멍 때리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감정 소모를 했을 것이다. 글쓰기 하니 깨알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무엇이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 감각을 열고서 느끼고 싶은 의지는 강렬했으나 닫힌 감각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필이 오길 기다렸는데 그걸 기다리다가는 한 줄도 못 쓸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거나 막 메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메모할 짬이 생기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이틀째, 무거운 마음에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물 한잔을 먹으러 주방문을 여는 순간 1평 정도의 주방에 3명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이유인 즉은? 첫날 새벽에 메모를 하다가 부스럭 거린다고 왕언니인 창희언니에게 한 소리 듣고 모두들 부엌으로 숨어 글을 쓰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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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이 따로 없었다. 60세를 전후한 언니 2명, 49세 나 1명, 32세의 처자 1명이  왕언니를 피해 숨죽이고 메모를 하는 꼴이 배를 잡게 했다. 나도 메모 본능이 후끈 달아올라 철퍼덕 주저앉았다. 메모하다 수다 떨고, 수다 떨다 메모하고 소리가 높아지면 쉬쉬하면서 우리는 동지애를 맘껏 발휘했다. 역시 압박(?)은 동지애를 키운다. ㅎ

개콘에 조용필(必)이라는 코너가 있다. 고시생 선배와 후배가 함께 사는 생활을 소재로 삼는데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고시에 집중하는 선배를 위해 후배는 소리를 자제한다. 조금만 소리가 나도 눈을 부릅뜨는 선배와 공존하는 눈물겨운 노력이 펼쳐진다. 그 코너를 보면서 뭐 저런 디테일까지 개그 소재가 되나 싶었는데 그 코너야 말로 우리의 상황이 아닌가. 

당시 우리의 상황은 조용필 코너를 압도했다. 메모를 해야 하는데 되지 않고, 웃어야 하는데 웃지 못하는 상황. 폭풍수다의 압력을 조절하면서 조용히 떠드는 강도 높은 자제력. 갑자기 관찰력에 대한 질문이 폭발한다. 처음엔 고시원의 비애를 웃음으로 비트는 개그맨의 관찰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찰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암은 친구들을 위해 여행기를 써야 했고, 개그맨은 새로운 코너를 만들어야 했고 우리도 여행기를 써야 하는, 그 절실함이 관찰력을 필요로 했다. 연암이 들으면 어이가 없겠지만, 내 머리 속에서 개그맨과 연암과 우리가 오묘하게 교차된다. 

솔직히 메모도 메모지만 수다 본능이 솟구쳤다. 특히 해숙 언니 목소리는 계속 커졌다. 난 왕언니가 한 마디 할까봐 해숙 언니에게 “언니 조용히 해.”라고 찔러대면 해숙 언니는 온몸으로 조용함을 표현한다.  난 바닥이 차갑게 느껴지자 슬리퍼를 방석 삼아 쭈그리고 앉아서 메모한다. 피난민이 따로 없다. 쓰기 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쓰니까 써지는 게 신통할 뿐이다. 관찰력이 없는 나는 ‘쓰기 위해’ 엉성한 관찰력을 기름 짜듯이 짜고 또 짜낸다. 만약 글쓰기가 없었다면 왕언니 뒷담화 뿐 아니라 소소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원한(?) 감정에 휩싸인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여행에서 돌아와서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아니 뒷담화조차도 글쓰기 재료가 되니 신이 났다. 오직 여행기를 써야 한다는 일념뿐! 그래서 난 좋은 여행 꿀팀을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myanmar-g1b1164fc7_640  곰샘은 드디어 우울증을 극복하셨다고 기뻐하셨다. 처방은? 다름 아닌 주역 쪽지 시험이었다.

 “좋은 여행을 바란다면 여행기를 반드시 쓸 것. 좋은 여행을 원할수록 돌아와서 후유증을 감당할 준비까지 할 것. 절대 향수병은 아니니 안심하고 이민 갈 준비 같은 건 절대 하지 말 것. 죽을 것 같은 우울증이 와도 안심하고 일상을 잘 챙길 것.”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일등 공신은 남산 산책이었다. 남산 산책을 하면서 한껏 부푼 기운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지중해 시공간에 세팅된 생체 시계가 서서히 남산 시공간으로 녹아드는 경험을 했다. 아무리 의욕 상실이 와도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과정은 우울증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곰샘은 드디어 우울증을 극복하셨다고 기뻐하셨다. 처방은? 다름 아닌 주역 쪽지 시험이었다. 그렇다. 연구실에는 일상을 놓을 수 없는 활동과 관계가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여행 꿀 팁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행을 가기 전 일상으로 복귀할 장치를 거미줄처럼 준비하고 갈 것!” 여기까지 생각해서 여행을 간다면 어떤 여행도 당신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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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abina님의 댓글

larabina 작성일

주방에서의 에피소드..조용~~필 너무 재밌어요. ㅋㅋ 여행을 하며 여행기쓰기 미션은 저도 꼭 실천해보려고 해요. 잘쓰든 못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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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님의 댓글

나영 작성일

환상적인 여행으로 팽창, 우울로 수축 ^^  그렇다면 우울감도 어느정도는 필요한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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