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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픈가요? 마음부터 치유하세요!, 이제마의 『격치고』

2024.09.15   조회수 121회    하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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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가요? 마음부터 치료하세요!’

이제마의 『격치고』
박장금
 
 
격물치지.jpg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가진 인간.
이제마는 이런 인간을 격물치지했다.
 
『격치고(格致藁)는 제목 그대로 ‘격치’하는 책이다. 격치란 천지만물을 잘 관찰해서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성리학적 공부방법인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비롯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제마는 인간을 격물치지 했다. 즉, 인간의 행동과 마음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것. 그의 관찰기에는 극과 극을 오가는 인간이 등장한다. 어떤 때는 부처와 같은 자비심이 샘솟고 어떤 때는 송곳 하나 꽂을 자리 없는 이기심이 솟구치는 인간이 오고간다. 우리는 이렇게 양면성을 가진 인간을 마주하지만 양면적인 인간을 모두 인정하기 보다는 좋을 쪽을 자신으로 설정하고 나쁜 쪽을 억압하느라 힘을 너무 쓴다. 이제마는 좋은 면을 선택하려들지 말고 둘다 나의 마음임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성인과 악인의 마음을 오가는 게 나의 마음이고 너의 마음이라는 것! 
 
스스로 경계(警戒)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실함을 돌아보는 것인데, 스스로 속이는 바를 면치 못하여 여러 번 회복하고 여러 번 잃어버려서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무가 이제 57세나 되었지만 아직은 속이는 짓을 잊지 못했다. 그런고로 더욱더 속임을 스스로 경계하고자 하나 그것을 잊기가 어렵다.
 
─ 격치고, 반성잠
 
이제마의 커밍아웃(?)이다. 57세가 돼서도 여전히 욕망으로 들끓는 불구덩이가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마는 학문도 높고 벼슬도 얻었기에 군자를 자처하며 대충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자 했을까. 그는 고백한다. 나이를 먹어도, 지식이 있어도 능력이 출중해도 자신을 속이는 욕망은 끝이 없다고! 세월이 간다고 해서 저절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계속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출렁이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는 속이는 마음을 바른 마음으로 곧바로 모드 전환하라는 것인데, 이제마에게 모드 전환이란 성실함, 매순간 정성을 다하는 태도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될 일인가. 누구나 자기가 중요하다 여기는 일, 이익 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일은 대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가 자신을 속이는 짓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마는 이것을 바로 잡지 않고서는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하여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격치고』를 썼고, 쓰는 행위 자체가 삶을 성실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내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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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李濟馬, 1837~1900), 조선말기 무사로 호는 동무(東武)다. 동무란 '동방을 지키는 무사'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제마를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창시자이자 명의로 기억한다. 그의 대표 저술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알려져있지만 『격치고』는 한의사들에게 조차 조명받지 못한 책이다. 사상의학으로 유명한 동무이기에 유학적 저술인 『격치고』는 부각될 기회가 별로 없었고, 한의사들은 임상이 없기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상이 없다고 의학과 무관하지 않으며, 임상이 있다고 의학만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는 원래 의사가 아니었고, 유교 문화권 사회에 무사였다. 물론 문인은 아니지만 무사인 그가 유학적 저술을 남긴 것은 그리 이슈가 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사인 그가 의학에 천착했을 뿐 아니라. 의학에 관한 책까지 쓴 것은 매우 특별해보인다. 그는 『격치고』를 13년 동안 쓰고, 그 후에 바로 이어 『동의수세보원을 1년만에 저술했는데, 『동의수세보원이 1년 만에 쓰여진 것은 『격치고』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격치고』에는 그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가 사상의학을 창안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격치고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동무의 인간 탐구는 성리학에서 출발한다. 인간 또한 자연으로 천리(天理)를 따르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천리란 만물에 내재한 법칙으로, 인간 또한 천리인 본성을 가진다는 전제가 성리학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은 그대로 보존되지 않고 사욕에 따라 변질되므로 그 성(誠)을 확충하고 보존하는 것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다. 이런 세계관은 조선의 선비라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 말기로 조선왕조 500년의 해가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이 가세하여 극도의 혼란 상태로, 성리학의 성은 본연의 뜻을 잃고 명분만 남은 상태였다. 백성은 굶주리고, 역병이 돌았으며,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고, 도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동무는 이런 시대를 한탄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제마는 도가 떨어진 세상에서 기존의 방식으로는 성(誠)의 보존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기존 성리학자들은 유불도 회통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성(誠)을 보존하기 위해 독서를 강조하거나 신체 단련을 위한 수행을 했다. 유불도 모두 자연의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각자의 길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원천인 도가는 양생술로 '정기신'을 닦는 것으로 나를 넘어 천지교감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유학의 천리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의학에 관심있는 유학자들은 도가에 관심이 있었고, 병을 고칠 수 있었기에 유학자 겸 의사인 유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마는 이것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여 그는 유의로 그치지 않고 '의학의 관점'에서 성리학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한다. 의학이야말로 몸을 변화시켜 병을 고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혜가 아니던가. 치료를 통해 병을 고치듯, 삶을 치료하는 학문이 필요하다 여겼던 것이다. 동무는 의학과 접속했지만 성리학적 지반을 떠나지 않았다. 사상의학이란 독창적 의학은 성리학과 크로스 오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상의학의 특징인 인간을 네 가지로 구분한 것도 맹자의 사단(四端)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옛 성인들이 말씀하실 때마다 인의예지를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일신의 귀중한 보배로써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세사람들은 사심으로 이를 헤하려 인의예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유리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롭지 않다고 여겨 이를 배반하니 오호라 성인이 어찌 너희를 속이겠는가...맹자는 사람이 지닌 사단은 인체가 사지를 지니고 있음과 같은 것이며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행하지 않는 자를 일컬어 스스로 해치는 자라고 했다. 정령 그렇지 않겠는가.
 
 ─ 격치고, 유략편

누가 자해를 하는가. 사지를 가지고서도 인의예지를 행하지 않는 자들이다. 왜 멀쩡한 사지가 있는데 사지를 쓰지 않는가. 사단이라는 보배를 가지고서도 왜 그 보배를 귀하게 사용하지 않는가. 사지가 바로 사단이다. 그러니 두 팔과 두 다리가 있는 자는 사심을 제거하고 사지의 본성인 인의예지를 발현하라! 오직 그것만이 병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사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맹자에게 배운 삶의 원칙이기도 했다.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 눈과 귀가 황폐해져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이루겠는가. 지혜가 없다면 누구도 나를 돕지 않으니 우환에 시달리고, 어질지 못하면 저 하나 설 곳이 없으니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고, 예가 없으면 매사에 법도를 어기게 되니 공연히 성질을 내고, 의가 없으면 투기나 게으름에 빠져 쾌락에 젖는다. 이것이 사람으로 할 짓이겠는가. 가히 슬플 따름이다.
 
─ 격치고, 유략편
 
모든 사람은 세상을 감각할 수 있는 잠재력을 타고났지만 눈앞의 이익에 경도되어 자신의 감각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이 있지만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 눈앞의 이익에 가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 인의예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실제로 눈과 귀의 기능이 현격히 저하된다. 이 또한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해서 얻은 결과로 후에 동의수세보원으로 집약된 것이다. 눈으로 제대로 보고, 귀로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자는 그 자체가 복이며, 눈과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자는 무지함 그 자체가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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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지를 가졌기에 성인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눈 앞의 이익 때문에 고귀한 삶의 길을 쉽게 포기해버린다.
 
하지만 이제마는 눈 앞의 이익 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잠재력을 보게 만든다.  “비록 나쁜 사람이라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변함없는 마음이 있고 비록 좋은 사람이라도 탐나비박(貪鄙懶薄)의 비루한 욕심이 있다.” 나쁜 사람이더라도 언제 인의예지의 마음이 생길지 모르니 그 마음을 키워야 한다. 또한 좋은 사람이더라도 언제 비루한 욕심이 생길지 모르니 안심할 수가 없다. 인간이란 관계 속에서 늘 선악의 줄타기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선인이든, 악인이든 자신의 상태에서 선함을 키우고, 악함을 제거하는 작업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 선과 악을 넘어 균형잡기, 즉 선악의 저편을 사유하기, 이것을 계속 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은 한번에 얻어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것만이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렇다. 격치고 집필은 그가 자유의 길을 가는 지도 그리기 작업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의사가 되는 길
 
이제마는 먼저 삶의 원칙을 세우기에서 시작한다. 관계에 대한 기준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학 경전을 정리하여 ‘유략편(儒略篇)’에서 좋은 삶의 원칙을 찾았다. 그  다음에 그는 변화를 위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자 했다. 
 
속일 마음이 있어 속이면 속이는 짓이 되고 말지만 속이려는 마음이 문득 발할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반성한다면 학문이 된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방심을 구제하는 것뿐이다. 범인들의 마음 중에, 혹은 주색에 혹은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속이게 된다. 그러나 그중 가장 집착하고 있는 욕심을 극복한즉 그 외의 잡다한 욕심은 극복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이 극복된다.
 
─ 격치고, 반성잠
 
 속이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에 끌려가지 않고 통찰할 수 있다면 마음 조절이 가능할 것이다. 마음 조절이 안 되는 주요인은 주색과 재물과 권력으로 그것들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반성잠(反誠箴)’에서는 사욕으로 가려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작업이 수행된다. 이제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으니 삶의 원칙에 맞게 실천을 해야 한다. 독행편(獨行篇)은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한 실천편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삶의 원칙을 밝히기 위한 유략편, 삶의 기준점을 회복하기 위한 반성잠, 수양을 위한 지침인 독행편으로, 격치고의 구성 목차이자 관계 변화를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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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치고』는“객관적인 사물(세계)은 나의 몸에 깃들고, 몸은 나의 마음에 깃들고, 마음은 세상일에 깃든다.”로 시작된다. 물신심사(物身心事)가 키워드인데 내용은 심오하니 일단 뒤로 하고 형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렇듯 격치고의 글 대부분이 네 가지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전개된다. 왜 그렇게 4란 숫자에 주목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사유는 맹자의‘사단’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원천은 자연 철학의 근본이 되는 택스트, 『주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사와 자집을 모두 통달하였는데 그중에 주역을 더욱 좋아하셔서 그 오의를 연구하시기에 몰두하셨다. 때로는 식사를 폐하고 연구에 심혈을 다하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술을 들어 밥을 입에 떠넣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누년을 연구하는 동안에 마침내 주역의 이치를 통달하여 그 묘체를 발명하게 되었다. 대개 사람이나 물체는 물론 하고 사상의 덕을 구비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헤아려 본다면 사람 알기를 신과 같이할 수 있다. 곧 사람의 수명 장단과 부귀빈천과 심술의 선악과 또는 길흄회린을 불로 비춰 보듯이 호리도 틀림없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조선명인전, 이능화
 
식음을 전폐하고 공부에 몰두할 정도로 주역은 이제마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잠시 주역의 세계를 엿보고 가자. 역(易)의 글자를 보면 일(日)과 월(月)의 합성자로 일은 변하지 않는 둥근 해의 모습과 월은 변화하는 달로서 초승달 모양을 담고 있다. 지구는 스스로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이런 천체의 순환은 지상의 변화로 드러난다. 춘분엔 태양이 적도를 기준으로 다가온다. 여름엔 북극을 기준으로 태양이 접근해 온다. 가을이 되면 다시 적도로 돌아가서 지구에 접근하고 겨울엔 남극 쪽으로 접근해 온다. 이런 태양의 위치변화로 말미암아 지구 온도가 달라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가 생긴다. 이런 변화를 크게 음양으로 말해지는 순환 운동으로 보고 지구뿐 아니라 삼라만상은 물론 인간의 신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세계관이다. 음양으로 출발한 세계는 계속 분화된다. 음양은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고.. 이제마는 음양에서 분화된 4개의 변화인 사상을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상체질.jpg
 
이제 이제마의 새로운 의학, 사상의학을 이해해보기로 하자. 세상은 음과 양으로 기운 변화를 일으키듯, 인간도 우주 기운을 다르게 부여받음로써 음양에서 한 번 더 분화한 사상인,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인으로 구분된다. 이런 사상적 구분은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연원한 것으로 인간 표준을 설정하기 보다는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하고 싶은 의지를 반영한다. 좀 더 섬세하게 구분된 인간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간은 우주적 존재로 하늘의 기운을 부여받는데 그 기운은 이목구비를 통해 몸으로 들어와서 폐비간신을 통해 발현된다. 불교 경전 법성게에서 말하듯 하늘의 보배비가 똑같이 내리지만 그릇에 따라 다르게 받는 것처럼 몸이 다른 만큼 기질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비대신소(脾大腎小)한 소양인은 일을 잘 벌이고 행동과 대처가 빠르지만 일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하는 한계가 있다. 반면 간대폐소(肝大肺小)한 태음인은 일을 쉽게 벌이지는 않지만 맡은 일을 책임있게 완수해낸다. 이처럼 모든 체질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격치고에는 체질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인자, 의자, 예자, 지자를 등장시켜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면밀히 살피고 있다. 결국 이런 관찰은 사상의학의 토대가 된다. 인의예지는 각각 태양, 태음, 소양, 소음과 연결되고, 타고난 본성은 인의예지인데 사심이 개입되면 탐라비박이 되어 욕심과 안일과 방종과 사사로움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 이 네 가지는 모든 인간의 마음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기질적으로 치우쳤으므로 치우친 점을 잘 통찰하면 자연스럽게 체질을 알게 된다. 『격치고』에는 각각 타고난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의 마음씀과 행태가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자가 사리가 분명하고 강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으나 진심으로 좋아함이 아니다. 조금 지나면 곧 오만한 마음을 드러낸다.
 
박자는 사랑을 베풀고 믿음직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 같으나 진심으로 공경함이 아니다. 조금 지나면 업신여기는 마음을 드러낸다.
 
탐자는 충의지사를 동정하는 것 같으나 진심으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지나면 적개심을 드러낸다.
 
나자는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사랑하는 것 같으나 이는 진심이 아니다. 조금 지나면 질투심을 드러낸다.
 
─ 격치고, 독행편, p275
 
탐라비박 인간들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제마의 관찰은 날카롭기만 하다. 이런 관찰은 ‘쯧쯧~인간은 어쩔 수 없어’라는 절망이 아니라 인간 존중에서 비롯된다. 그는 인간 내부에 들끓는 온갖 마음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기에서 시작한다. 우리 안에는 비박탐라와 인의예지가 같이 출렁인다는 것. 어떤 쪽으로 마음을 쓸 것인가! 비박탐라가 힘을 더 얻을 때 우리의 심신은 아프다는 것. 마음의 병이 몸의 질병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마음 수양서 『격치고』의 저술 과정은 몸의 치료서 『동의수세보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려면, 비박탐라의 마음을 인의예지의 마음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가 약물이나 침으로 치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직 자신만이 수양을 통해 이기적인 마음에서 성인의 마음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치료란 의사에게 의존하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수행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마는 누구나 자신의 의사가 될 수 있고,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제마가 『격치고』를 쓴 이유인 것이다.  
 
타고난 재능은 치우침일 뿐!
 
너의 지혜에 교만하지 말라. 너의 지혜가 얕은지 모른다.
너의 능력에 자긍하지 말라. 너의 능력이 혹 척박한지 모른다.
너의 재목을 앞세우지 말라. 너의 재목이 치졸한지 모른다.
너의 노력을 과장하지 말라. 너의 노력이 궁색한지 모른다...
 
─ 격치고, 천시, p77
 
누구나 지혜, 능력, 재목, 노력 중에 적어도 한 가지는 타고난다. 이것은 우주의 원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뛰어난 구석이 하나씩은 있으니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자뻑할 일은 아니다. 예컨대 겨울이 겨울답기 위해서는 여름의 기운을 완벽히 포기해야 한다. 하여 어떤 능력을 타고났음은 다른 능력의 한계를 동시에 의미한다. 태양인의 경우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매우 밝다. 이런 이치 파악을 통해 교우관계는 쉽게 맺지만 세심하게 사람 챙기기는 태음인보다 둔하다. 태음인이 데이터 중심으로 사유하는데 반해 태양인은 중요한 기본 원리 중심으로 문제 핵심을 짚어 나간다. 한마디로 태양인은 직관이 발달했다. 반면에 태음인은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다. 충분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납득할 수 있어야 사회적 관계도 맺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한쪽이 뛰어나면 다른 방면은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치우친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가 부여받은 어떤 능력도 치우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우침은 수행에 따라 고유한 능력이 된다. 그것이 비박탐라가 인의예지가 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비박탐라라는 이기적 치우침을 인의예지라는 고유한 치우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이 길을 스스로 열어야 한다. 헌데 이 길을 어떻게 열 것인가?  
 
대중과 더불어 이롭다면 그 이로움 또한 인이며
대중과 더불어 용기를 낸다면 그 용기 또한 의이며
대중과 더불어 조화를 도모한다면 그 도모 또한 예이며
대중과 더불어 하는 앎이라면 그 앎 또한 지다.
 
─ 격치고, 유략, 천하편
 
사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치우침의 결과지만 어느 계절도 계속 머물지 않는다. 밤은 낮을 통해, 시작은 끝을 통해, 끝은 시작을 통해 순환한다. 독립된 기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서고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더불어 존재하기에 지구에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대중과 더불어 도모한다는 것은 이런 자연의 원리를 자기 삶에 구현하는 것으로, 이것이 인의예지가 발현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때에 따른 나서고 물러섬, 생명의 원리는 이러하지만 눈 앞의 이익은 소유와 집착의 마음을 일으켜 본성을 가린다. 그때마다 ‘더불어’를 사유할 수 있다면 나서고 물러서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인간의 잠재력, 인의예지는 체질의 탁월함이 아니라 더불어 할 때 빛나는, 나를 지울 때만이 발현되는 기다림의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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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우고'함께'를 사유할 때, 우리의 능력은 그만큼 커진다. 
 
마음과 몸은 하나
 
이제 『격치고』『동의수세보원』으로 완성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의학의 기본인 기(氣)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에너지가 물질을 만들고 또 물질이 다시 에너지가 되는 원리다. 예컨대 수증기가 물방울을 만들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선현들은 보이지 않는 기운을 감지했다. 삼라만상은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표현되고 사람 또한 그러하다. 한의학에서 진단할 때도 혈색과 피부, 목소리, 기침, 호흡, 피부, 걸음걸이, 행동 등등을 보는 것은 기의 상황을 체크하여 오장육부의 기능을 판단하기 위함이다. 단서는 모두 드러나 있다. 의사는 셜록 홈스(Sherlock Holmes)처럼 탐정이 되어야 한다.
 
셜록.jpg
우리 몸은 기의 단서다. 이런 한의학적 지반 위에서 이제마는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 유형별로 기를 다스릴 방도를 찾았다. 사실 이런 결론은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생을 탐정이 되어 추리한 덕분에(격물치지) 보이지 않는 네 개의 기 흐름을 읽은 것이다. 한의학에서 몸은 타자들의 공동체이다. 아무리 뛰어난 세포도 사지도 오장육부도 이웃과 함께한다. 기란 네트워크의 다른 이름이고, 이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때만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 인의예지를 경험할 수 있다. 기의 흐름이 마음이고 그것이 쌓여 몸이 된다. 하여, 격치고가 마음을 치료하는 책이라면 동의수세보원은 몸을 고치는 책으로 결국 두 책은 세트인 것이다.  

격치고는 인간이 고귀해지길 원하는 이제마의 절실함의 기록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13년에 걸친 인간 탐구 보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관찰 대상은 타자인 동시에 자신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네가 원하는대로 살라'고 한다. 이것은 헛된 망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한, 저절로 원하는대로 살 수가 없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사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순간 경계하는 것’일 뿐. 내 안에 올라오는 온갖 찌질한 마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전적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 또한 ‘함께’를 잊지 않는 것. 이것만이 가장 고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가는 길이다. 이런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몸은 이미 수많은 세포의 공생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하여 공생을 거부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결국 몸을 병들게 한다. 그렇다고 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병이란 내가 비박탐라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으로 몸이 나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인간탐구서 『격치고』가 의학서 『동의수세보원』으로 정리되는 건 마음과 몸은 하나라는 명제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여 마음을 경계하고자 했던 이제마가 몸을 치료하는 의사가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몸의 치료란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고, 자유로운 삶이란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기심을 전환하는 능력에서 시작됨을 이제마는 『격치고』를 통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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