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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붓다의 가족 사랑

2024.03.06   조회수 193회    하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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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족 사랑 


박 장 금

출가, 가족을 등지는 것?

우리는 보통 출가하면 가족을 등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가 알만한 스님들 에피소드에서도 가족을 냉철하게 끊어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교 영향으로 효가 무엇 보다 중시돼서 더 그런 것도 같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자신을 수신하고 그것을 확장하여 가족을 다스리고 국가를 통치하며 천하 평정 모델에 익숙한 우리는 가족을 등진 출가가 왠지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저러한 탓에 불교는 부모도 모르고 냉정한 종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붓다의 아들 이름은 장애의 뜻을 가진 ‘라훌라’였다. 그걸 보더라도 붓다는 가족을 장애로 여겼고 그것을 단절하기 위해 출가했구나 싶다. 그렇다면 출가는 가족이라는 장애를 단절하는 걸까. 출가가 가족 단절이라면 가족은 누가 구원하는 걸까. 그리고 장애를 단절한다고 장애가 없어지는 걸까. 그것이 정말 장애라면 부딪혀서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붓다는 중생 구제를 위한 삶을 살았다. 아니 중생구제 자체가 붓다의 삶이었다. 그런 붓다의 삶에서 가족이 쏙 빠진다? 이것도 좀 이상하다.

가족 관계의 어려움은 붓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도 가족 관계는 늘 어렵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모나 자식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식과 부모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막상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고 그것을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때 화가 난다. 그럴 때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아니면 여과 없이 쏟아내기 일쑤다. 그렇게 하길 반복하다가 대충 타협하거나 단절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사실 대충 타협은 말이 좋아 타협이지 단절의 가장 나쁜 형식일 가능성이 높다. 참으로 가족 관계는 어렵다. 가족이 원하는 걸 대충 맞춰주거나 그것도 어렵게 되면 단절하거나! 이 길밖에 없는 걸까. 중생구제의 아이콘 붓다는 가족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풀었을까. 우리가 가진 이미지처럼 출가는 가족과 단절하면 그만인 걸까. 정말 궁금하다.

가족, 가장 큰 장애

붓다가 활동하던 시기는 경제 기반이 농업사회에서 도시사회로 급변하는 시기였다. 붓다는 인도 북부 네팔 국경 가까운 곳에 샤가족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금수저들은 어떻게 하면 더 누릴까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타고난 최상의 조건을 권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삶이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죽는 자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 대해 갖는 동정심 같은 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남달랐다. 예컨대 병든 사람을 보면 자신의 병듦을 보았고, 타자의 죽음도 자기 죽음으로 여겼다. 왕자로써 누리는 부도 누군가의 노동 대가로 누리는 게 보였고, 사랑도 영원한 게 아니라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에 비친 인간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는 매우 괴로웠고, 이 난제를 풀고자 했다, 그는 불멸의 세계이자 속박 없는 자유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버지 숫도다나 왕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는 싯다르타의 출가를 막기 위해 세속적 향락을 제공했다. 그는 쾌락에 흔들리지 않았다. 왕은 가족을 이루면 안정될 거라 여겨 결혼을 제안함으로서 출가를 막았다.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부탁을 뿌리치기 어려워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도 안정은커녕 출가를 향한 결심은 더 커져만 갔다. 왕이 된다 해도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출가를 끝까지 막자 그는 아버지에게 4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것, 영원히 병들지 않는 것,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사는 것이다. 숫도다나 왕은 말문이 막혔고, 출가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중년 이후 출가를 권하였다. 지금은 너무 젊으니 당장은 나라와 가족 부양에 책임을 다하고, 그다음에 하라는 것.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어려서 죽은 사람에게 중년은 있을 수 없다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해결하는데 노년까지 미룰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한 출가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번뇌 해결을 위해 떠나는 거라고 의사를 정확히 밝힌다. 싯다르타의 확고한 태도에 숫도다나 왕은 막을 수가 없었다. 왕은 마지못해 허락은 했지만 여전히 비통해했다. 싯다르타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아들 라훌라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운 아들을 결별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강한 애착을 느꼈으면 장애라고 했을까.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과감하게 자유의 길을 선택했다. 출가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관계의 전환, 애착에서 구도로

싯다르타는 굳이 집을 떠나야 했을까? 집에서 자유의 길을 찾을 수는 없는 걸까? 집은 안온한 곳이다. 게다가 가족은 애착과 부채감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부모는 자식을 지극히 돌보는 게 사랑이라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돌봐주면 훌륭한 부모라고 생각한다. 이 관계에 익숙해지면 애착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싯다르타 출가 후 양모 고타미는 아들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제 싯다르타는 성인이 되었지만 양모는 여전히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동물들도 새끼가 어느 정도 양육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래야 새끼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의 안온함과 부모의 정에 이끌려 집을 떠나지 못하면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도 훌륭한 왕이자 좋은 아버지였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싯다르타도 그 덕분에 안락한 의식주 속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 관계 속에 있는 한, 부모의 보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싯다르타의 출가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어른이 되려면 집을 나서야 한다. 다만 싯다르타가 남다른 지점은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집을 나섰다는 점이다.

싯다르타는 출가 후 6년을 고행한 뒤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그는 생로병사 앞에 던져진 인간 구원의 길을 찾았고 그 가르침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도시화가 가속되는 사회 분위기는 붓다의 사상을 필요로 했고 붓다는 최고의 셀럽이 되어 있었다. 숫도다나 왕은 아들의 명성이 높아지자 금의환향을 기대하면서 아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보내는 자들마다 아들을 데려오기는커녕 가는 족족 출가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붓다는 드디어 고향을 찾게 되었다. 숫도다나 왕은 붓다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눈으로 붓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그는 크샤트리아인 붓다가 브라만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니 우쭐해졌다. 아들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붓다의 탁발이 눈에 들어왔고, 아들의 걸식에 수치심이 올라왔다. 이것은 크샤트리아 가문의 명예를 짓밟는 짓이고,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아버지를 거부한 행위로 여겨졌다. 붓다는 아버지에게 탁발은 ‘출가 비구의 관습’이라며 설명을 했지만 ‘왕의 위신’이 중요했던 숫도다나 왕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숫도다나 왕은 여전히 붓다를 자신이 보호해야 할 아들이자 분신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붓다는 아버지의 애착을 끊어내야만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아로 삼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걸식을 부끄러워했던 것도 왕의 가문을 자아로 삼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탁발에 대해 아버지에게 말한다.

 

붓다 대왕이여, 이것은 당신의 왕족 가문의 전통이 아니고 ‘저의 붓다 가문의 전통’입니다.
숫도다나왕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게 무슨 말이냐?
붓다 : 과거의 수많은 부처님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숫도다나왕 (정적이 흐른 후) 너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알겠다.
붓다 아버지, 누구나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드리는 법입니다. 제가 발견한 최상의 선물인 ‘진리의 법’을 아버지께 드리니 받아주세요. (법구경, 붓다연대기 참조)

 

붓다는 아버지에게 자신은 ‘왕의 후손’이 아니라 ‘붓다의 후예’라고 말한다. 왕족의 자부심으로 꽉 찬 숫도다나 왕은 뒷목을 잡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숫도다나 왕은 분노하여 아들을 가문에서 내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욕망을 힘들게 내려놓고 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이 부자의 갈등은 늘 그래왔다. 출가를 할 때도 갈등을 빚었지만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믿고 지켜보았다. 솔직히 숫도다나 왕의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로 인해 우쭐했다가 탁발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가 그것을 아들에게 얘기를 했다가 뒤로 물러서는 등. 아버지도 아들로 인해 엄청난 심경의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숫도다나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누가 왕의 권위에 도전했겠는가.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은 했지만 아들로 인해 마음 비우는 훈련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생사 마음대로 안 되는 일에 관대해지는 기회가 됐을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부자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끝나자, 붓다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아버지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법’을 선물한다. 아버지가 진리의 법을 받는 순간 부자 관계는 달라졌다. 생물학적으로는 숫도다나 왕이 아버지였지만 이제 진리의 법을 깨달은 붓다가 스승이 된 것이다. ‘부자지간’에서 ‘사제지간’으로의 대전환! 이것이 붓다의 가족 사랑법이다. 가족을 버리는 게 아니라 가족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 붓다는 아버지를 애착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구도의 길을 함께 할 도반 관계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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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붓다의 가족 사랑법이다. 가족을 버리는 게 아니라 가족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

이런 붓다의 가족사랑은 이후에 많은 사람에게 자극이 되었다. 초기 경전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가족들이 많이 등장한다. 겉은 부부지만 속은 평생 수행 도반인 부부라거나 온 가족이 승가에서 수행 도반이 되는 등. 소유와 애착 관계를 벗어나 생로병사의 길을 함께 모색하는 관계로 전환된 가족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 가족은 단절의 대상이 아니다. 붓다의 중생 구제 속에는 가족 구제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모든 생의 부모를 구하다

붓다는 아버지에게 ‘진리의 법’을 선물로 드렸다. 그 후 숫도다나 왕은 붓다의 설법을 들으면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변화는 숫도다나 왕의 죽음 앞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대자유를 누리며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진리의 법은 붓다가 아버지에게 드린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그 후 양모 고따미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당시 붓다로 인해 붓다의 사촌 난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 샤가족 왕자들이 줄줄이 출가했다. 그러자 고따미는 이제 가족 서포트의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살고 싶다며 붓다에게 출가 의사를 밝혔고, 많은 여성이 그 뒤를 따랐다. 당시 붓다는 여성도 당연히 자기 구원의 주체라 여겼지만 위험한 환경과 미성숙한 비구들과 함께 수행하는 문제 등으로 고심을 했다. 결국 붓다는 엄격한 계율과 상가를 통제함으로써 여성 출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붓다로 인해 깨달은 양모 고따미는 자신을 구원함으로써 여성 구원의 길까지 열게 된 것이다.

붓다의 가족 구원은 이생에서 머물지 않았다. 붓다는 도솔천에 있는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을 했다. 천상은 어떤 고통도 없는 곳이다. 우리는 고통이 없고 좋은 것만 있는 곳에서 태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그곳에 태어난다 해서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비선악 등의 경계를 깨지 않고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천신들도 깨닫고자 열렬히 응원했던 것이다. 붓다는 천상으로 올라가 석 달 동안 진리의 법을 설했고, 그로 인해 마야 부인은 깨달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어머니뿐 아니라 천상의 많은 신들까지 구원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붓다는 아버지 숫도다나, 양모 고따미, 친모 마야 부인까지 진리의 법으로 이생의 부모를 모두 구원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붓다의 진리 파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전생의 부모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어느 날 노부부가 등장했다. 노부부는 붓다에게 아들이라 부르며 늙은 자신을 왜 보살피지 않냐고 꾸짖었다. 원래 붓다는 한곳에 머물지 않았는데, 노부부를 만난 후 3개월 동안 그 집에서 공양을 했다. 제자들이 궁금해하자, 붓다는 이 노부부는 오백 번의 생애 동안 나의 부모님, 나의 숙부와 숙모, 나의 조부모였다고 말한다. 노부부는 자신들이 늙고 병듦에 대해 매우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의 괴로움은 스스로 노인으로 규정짓는 그릇된 견해로 인해 일어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붓다는 3개월간 공양하면서 가르침을 설했고 노부부는 열반에 들 수 있었다. 이때 전생 부모뿐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

 

가족사랑, 중생 구제의 출발점

오백 번 생애 동안의 부모, 숙부와 숙모, 조부라니! 나란 오백 생애 동안 그 많은 생명의 연결 속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일본의 인류학자 나가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서 염소 이야기가 생각난다. 네팔에서는 염소 도살장으로 가서 염소와 마주하며 자비 명상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마음은 연속체를 이루어 거대한 생명 윤회의 순환을 한다는 것. 이와 같은 세계관에서 염소는 한 번은 자신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염소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며 고기로 먹히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인간은 물론이고 온갖 생물들은 나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고 형제이자 자매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모든 존재에 대해 저절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된다.

대승불교에는 사무량심이라는 게 있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할 때 일어나는 자비희사의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아들로 여겨 무한한 자애심으로 상대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고(慈), 불행이 닥쳤을 때 함께 슬퍼하고(悲),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고(喜),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마음(捨)이다. 이 마음은 가족을 향한 사랑을 전 인류에게 확장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에서 강조한 ‘보리심’도 다르지 않다. 가족이 괴롭다면 당장 달려가 괴로움을 없애 줄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라면 당장 가서 깨닫지 않겠는가. 그래야 가족을 구할 수 있으니까. 내가 먼저 깨달아서 고통스러운 존재의 번뇌를 없애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보리심인 것이다.

붓다에게 깨달음이란 대자유에 이르기 위한 부단한 탐구였다. 그리고 출가란 자유를 위한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끝낸 붓다가 가족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불교가 일반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외면한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편견에 기인한 것이다. 출가란 애착의 가족 관계를 떠나 ‘구도의 관계로 가족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다. 붓다의 중생 구제 배경에는 가족 사랑이 있었다. 하여 가족사랑은 중생 구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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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란 애착의 가족 관계를 떠나 ‘구도의 관계로 가족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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