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에세이_장윤진 > 숙제방

본문 바로가기

숙제방

목요기초탄탄 3학기 에세이_장윤진

2024.09.15   조회수 150회    장윤진

본문

내안의 여성성

 나의 여성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심당 기초탄탄스쿨 3학기 교재인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으면서 부터이다. 이전부터 의문이긴 했다. 내가 왜 남들 한참 일할 나이, 일할 시간에 청일점으로 하심당에서 공부하게 되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윤진‘ 이름부터가 여성적이고 중성적인 이름이다. 지금은 만족하는 이름이지만 어릴 적에는 여자 같은 내 이름이 싫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이름으로 놀리는 것도 싫었고 체격도 왜소하고 곱상하게 생겨 여자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성격도 내성적이여서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보고 공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까지 우리집은 너무 가난했다. 육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어머니를 만나 좁은 반지하집에서 삼촌과 고모들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나와 동생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가족끼리 제대로 된 여행이나 시간을 함께 보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당연히 나의 이런 여성적인 성향을 부모님은 알리가 없었고, 그냥 성격이 약간 예민한 아이인가보다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는 큰집의 큰아들인 나를 강하게 키워 집안의 대들보가 되길 바라셨다.
  어릴 때는 수줍음이 정말 많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었고, 남자답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실제로 친구들과 육체적으로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여자애들한테도 맞고 다녔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이런 남자답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 소위 논다는 애들과 어울려도 보고 여러 가지 운동도 해보았으나 원래의 기운을 의지로 바꾼다고 사람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의 사주원국은 천간의 4글자가 모두 음간이며, 음기운의 상징인 수기운이 충만하다. MBTI(성격유형검사) 에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INFJ(내향형 끝판왕) 남자 1.6% 유형이라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다.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동물을 좋아했고, 인형을 좋아했다. 남몰래 숨어서 울면서 순정만화도 봤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엄마는 태권도장을 보내줬다. 강아지 배게를 갖고 싶어서 울며 불며 사달라고 해도 남자는 그런거 필요 없다며 끝내 사주지 않으셨다. 대학교 때 여자친구가 선물로 강아지를 사줬다. 아버지는 발로 강아지를 발로 차고 다녔다. 충격을 받아 강아지를 팔아버리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뭔가 내안의 여성성에 대한 서러움이 많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남자는 무조건 남자다운 색의 옷을 입어야 되는 거야 화려한 색은 안돼‘, ’남자는 힘과 권력이 있어야 한다. 도태되면 죽는 것이야.‘ 이렇게 세뇌되며 살아왔다. 이런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었고, 남자답게 성격을 고쳐야만 되는 줄만 알아서 사춘기 때 정체성에 큰 혼란이 왔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 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아니면 방송국에서 음악관련 일을 하고 싶었으나 남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에 자연스럽게 이과, 공대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본인의 인생을 일만하시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뭔가 나도 성공해서 부모님께 인정받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어 생각지도 않은 진로를 택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의 기운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소모되어가는 삶을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운이 좋게 규모가 큰 회사에 취업을 했고, 거기에서는 협력업체를 이끌어서 성과를 내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회사에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성과를 내는 전형적인 외향적이고 능력 있는 남성성을 요구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전통 있고 항상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로봇을 만드는 전공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선후배 관계가 너무도 엄격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군대에서도 엄격한 상하관계의 규율과 폭력적인 조직문화가 너무나 싫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적응 못하는 내가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나는 왜 직장, 학교, 군대에서 적응하지 못하지? 왜 실패만 하는 걸까? 하며 자책만 하며 살아왔었는데 하심당에서 푸코를 공부하며 지난 삶은 주체적이고 독립된 개인으로 살지 못하고,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비정상성과 규율권력대로만 살아왔음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명리적으로 보았을 때는 과다한 수 관성의 영향으로 사회와 조직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억지로 내 자신을 맞추면서 살아온 영향이라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몸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수업시간에 장금 선생님께서 자신의 모자란 기운을 채울 생각보다 먼저 가지고 있는 기운을 잘 사용하라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푸코가 말하는 번개 같은 진실의 감동? 인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같은 거창한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무언가 깨달음이 왔다. 그동안 외부적 시선으로 사회에 맞추는 삶에서 시선을 내부로 돌려 그동안의 나의 삶과는 다른 ’이질적이며 헤테로피아적인 지층‘이며 ’본래의 나를 찾는 참나의 지층‘으로 내면의 인도자가 이끌어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부터의 삶은 사회가 주입한 남성성이 아닌 나만의 ’음기운‘과 ’여성성‘으로 살아 보도록 하자!

나만의 여성성을 찾아서

 이 시대의 여성성이란 무엇일까? 장금 선생님은 디지털 시대의 핵심은 연결성이며 연결성은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이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훨씬 뛰어나다고 하셨고 전적으로 그에 동의하는 바이다. 나의 사주 원국에는 수기운이 60점으로 가장 비중이 높다. 고미숙 선생님의 저서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p160>에서 “대학의 몰락과 대중지성의 부상이 그 증거다. 전자가 계몽이성의 산물이라면, 대중지성의 철학적 비전은 노마디즘이다. 디지털이 물처럼 파동처럼 흘러가듯, 노마디즘 역시 머무름 없이 흘러가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곧 우주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디지털시대에 필요한 수 기운이 나에게는 충만하지 않은가? 물처럼 흐르고 상황에 잘 적응하는 능력으로 공부를 통한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해나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동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은 자연과 조화로움을 추구함에 반해 서양은 자연을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점에서 동양의 고전은 서양 고전에 비하여 훨씬 여성적이라고 느꼈고, 동양 고전 중 여성성에 대한 책을 공부하면 나만의 여성성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같이 공부하는 혜숙 선생님께서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다. 홍루몽은 수많은 고전 중에서도 가장 여성성이 넘치는 텍스트라고 한다. 홍루몽은 역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한국사람의 특징과 정반대되는 느리고 세밀하며 반복되는 리듬이 특징이고 우리 삶의 모드 전환과 연결될 수 있는 여성성에 대한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훌륭한 고전이라고 한다. 홍루몽의 주인공인 보옥이라는 인물은 생물학적인 남성이지만 남성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여성들과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는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관심 없이 규중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어찌 이럴 수가! 설정 자체가 영혼의 쌍둥이 형제를 만난 듯하다. 내면의 인도자가 홍루몽이라는 지도를 들고 손짓하며 안내해주는 느낌인 것만 같다. 나의 존재에 대한 탐구 재료로서 공부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얘기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고민거리나 새롭게 발전시켜 갈 이슈에만 에너지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중략> 별일도 아닌 것 같은 묘사와 사건들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오직 한 가지 선명한 사건만이 뚜렷이 솟아오른다. 바로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매일이 선물인데, 그날의 어떤 순간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 시간이 간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고, 차이가 생겨나는 곳이 바로 매일의 반복이다.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 p31~33>
 거창한 능력이나 지위에 올라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존재를 바꿀 수는 없다. 일상에서 신성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성은 권위보다는 유머, 공감, 자기 혹사 보다는 자기 배려, 존중 등 부드럽고 살리는 기운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목기운 ’인성‘이 용신 인데 작년부터 감이당에서 접속하며 생명을 살리는 목의 기운, 즉 여성성의 기운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고 꼬여있는 답답한 인생이 삶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랄까? 내면의 인도자를 따라 내안의 여성성을 숨기지 않고 발산해 보면서 살아보려 한다. 여성성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의 이 시대가 반갑고 좋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2024 HASIMDANG.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