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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세미나 극단적 고립에서 건강한 고독으로 향하는 삶의 균형감각

2024.09.26   조회수 76회    김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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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열 손가락 내로 만나면서 겉 이미지로만 나에 대해 평가 할 때는 꽤나 외향적이어서 사회적응 잘 할 것 같고 쾌활하다고 의심없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첫 만남에서는 잘 웃고, 꽤나 친밀하고 솔직하게 상대에게 다가가는 덕분이다.
하지만 사람의 진짜 속을 누가 알수 있을까? 
나 자신도 시시각각 변하는 속마음을 종종 알기 어려운데 말이다.

나는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립되어 고독한 잠수쟁이였다.
타고난 성품이 쾌활하다면 잠수쟁이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잠수쟁이는 무의식적인 고립형일까? 의식적인 고독형일까?

나의 타고난 성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모른 채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성향을 딱 하나로 정의 내리는 것이 언젠가부터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낙인찍고 싶지 않아지면서 타인을 바라볼 때도 시야가 확장되었다.

나의 인격이 다채롭고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에 지루할 틈 없이 하루하루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남은 인생은 좀 더 의식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중독 패턴을 찾아보며 심신을 탐구해보는 <하심당 워크샵>을 신청했다.
그리고 마지막 12회기인 점검의 날, 나의 인생을 회고하며 <고립 중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전학와서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나며 컴컴한 어둠 속 절벽 앞에 서있듯 두려움과 불안함이 나를 항상 감싸고 있었고, 그로 인해 무의식적인 고립을 택하며 <가면 쓴 조울증>이라는 단어가 곧 잘 나를 상징하는 단어였으니 말이다.

새 학교에 전학오자마자 왕따를 당한 이후 나는 사회적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표정이 너무 굳어져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애늙은이 같았고,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공포스럽던 생명체들 앞에서 애늙은이를 숨키고 거짓 쓴웃음을 지어내는 광대 같았다.
왕따 사건도 제대로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강하게 집단의식과 사회적 친밀감을 빌드업해나가야 할 시기에 성폭행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겨우 숨붙이고 있던 <작은 나>를 토막토막 조각내고 짓밟고 뭉개버렸다.

그 날 나는 나도 모르게 왕따 사건처럼 내 의식의 스위치를 꺼버렸던 것 같다.
의식불명상태가 되었는데 이제와 보니 생존 전략 중 하나인 <얼어붙음>을 택했던 것이다.
육신은 옅은 숨을 쉬며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영혼은 얼어붙은채로 기약없는 혼침에 들어갔다.
어떤 누구도 내 주변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 몸도 마음도 언어도 굳어 버렸다.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고 덮어진채로 치유를 시작하기 전까지 고립의 깊이는 더욱 더 깊어지고 그 안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주 체했고, 소화장애와 만성 변비, 심한 생리통으로 인한 독한 약성분에 취해 있었고,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식은땀이 자주 흘렀고, 주변의 사소함에 지나치게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 자주 흐리멍텅해졌으며, 기억력은 너무나 가혹하게 안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높은 층고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나 영원히 사라져버리거나 무인도에 혼자 있는 망상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내면에 스스로 가두어 놓고 밖에서는 고독한 척 연기하는 생활을 하며 내 안에서 고립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의 불씨가 점점 희미하게 옅어져 가는지도 모른 채 원하지 않았던 두 사건들로 인해 인생에 대해 새로운 역사를 쓰려하기 보다는 그 환경에 굴복되고 잠식되어 버렸다.
세상이 늘 어두웠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어른 인 척하며 권위를 내세우는게 가증스러웠고, 역겨웠다. 그런 부정과 거부라는 방어전략으로 나는 스스로를 고립 상자에 가두고 꽁꽁 묶어버렸다.

학교에 가기싫을 땐 언제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멍때리며 앉아 있었고, 단체 생활을 해야한다거나 친구들이 3명이상 모이는 장소에 나가야 하기 전 날엔 다리가 잘린 채로 허공에 붕붕 떠서 두려움에 떨거나 결국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리곤 어김없이 그 불안과 두려움이 현실에서 연결되어 갑작스레 못나간다고 연락하여 수련회나 소풍에 빠지거나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 습관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까지 쭈욱 이어졌는데 그 때는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일이 나에게 종종 일어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며 스스로를 학대하고 비난하며 존재자체를 거부해버렸다.

대학 졸업이후 사회 생활하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전쟁터같은 조직에 나가다보면 금새 지쳐서 숨이 안쉬어지고 굳어버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모임 가기싫을 때마다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패턴대로 사회생활에서는 사직서를 쓰고 이직 생활을 자주 했다. 그런 생활을 몇 년동안 반복해보니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내 문제임을 직면했고 사회 부적응자로 스스로 꼬리표를 달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고 간헐적인 자살 충동을 느끼며 여전히 삶으로부터 고립된 채 연기하며 살았다. 그나마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느꼈던 남자친구와 10여년 연애를 하며 서로 많이 의지했고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 자살 예방책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 대한 믿음은 내 인생 믿음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사회생활에서 바닥까지 치고나서는 그 친구의 한결같은 믿음 덕분에 삶에 대한 희망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무대공포증이 심했던 여린 심신의 내가 요가강사도 오랜 시간 걸렸지만 적응할 수 있었다. 소울메이트라 생각했던 남자친구가 내게 보내는 끝없는 믿음뿐 아니라 심리상담과 자연치유, 몸과 마음에 대한 책과 공부들 덕분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안정감이라는 감각을 발견했고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몸으로 지구라는 에너지의 안정감음 체험하니 그 이후로는 다리가 허공에 뜬 채로 추락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고, 까무러치게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종종 과거의 나의 고립되어지는 패턴들은 관계속에서 불쑥 뛰쳐나오곤 해서 혼자만의 동굴로 침잠하곤 했다.

그리곤 우연히 알콜 의존증을 스스로 치유해보고자 호기심을 가지고 알코올 관련 책들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캐럴라인 냅 저자의 <명랑한 은둔자>에서 <고립과 고독에 관한 차이>를 읽고 나의 경험과 공명되어 저자와 나란히하여 한참을 울고, 웃었다.
오랫동안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던 스스로 사회부적응자로까지 낙인 찍었던 <고립 중독에 대한 엉켜있던 실타래>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저자의 명료하고 솔직한 생각을 옮겨 적으며
남은 인생은 극단적 고립에서 자발적 고독으로 향하는 삶의 균형감각에 몸을 내맡겨 보려 한다.

“<고립>은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고립은 25명이 가득찬 파티룸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 거리를 두고 싶은 기분, 내가 겉모습 너머에서는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혹은 문제투성이인지,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세우고, 그 뒤에 숨고싶은 강박과 관계된 느낌이다.  고립은 잡초처럼 슬금슬금 자라나서 당신을 붙들고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는 어떤 마음 상태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며 그저 고독할 뿐인데 그러다 어느새 고립된다. 당신은 만족하고 있는데 어느새 외롭다. 당신은 스스 로 잘 통제하고 있는데 어느새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갇힌다.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모호하며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한 때 고립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고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그것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깊이 이해하고 선택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5년전, 10년 전만 해도 그레이스는 자기 집에 숨어 살았다.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광적이고 복잡해서 만나고 나면 진이 빠지고, 뭔가 다친 것 같고, 이해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너무 힘들어. 너무 화나거나, 실망스럽거나 지쳐. 혼자 있는게 훨씬 더 쉬워 그래서 그레이스는 고립되었다.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고, 초대는 극히 드물게만 받아들였으며 그럴 때도 늘 두려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세상>을 깎아서 줄여나갔다. 그러면서 걱정했다. ‘이게 삶일까? 앞으로 생을 계속 이렇게 살게 될까?’......
46살인 그레이스는 여전히 금요일 밤 혼자 닭요리로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보내는 날이 많지만 걱정은 누그러졌다. 그를 은둔으로 몰아넣었던 두려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예전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풍요로운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데다가 생계가 되어주는 일을 갖고 있다. 좋은 심리치료사 덕분에 자신을 훨신 더 잘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늘 분명하거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상태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고립상태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17-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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